1월 21일 일요일
생활관 오픈 시간이 오후 1시인데 현식씨 차는 오전 11시즈음에 주차가 되어 있었다. 순간 그의 차를 보고 생활관 오픈 시간을 내가 헷갈리고 있는건가 생각도 했다. 어쨌든 오늘의 첫 손님은 현식씨다.
요즘 부쩍 호동이(사라진 해양이와 비슷하게 생긴 아직 어린이 고양이다)가 생활관 창문가에 자주 머문다. 오늘도 호동이가 추운 날 안에서 쉴 수 있는 걸 선택할 수 있게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그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다행이다. 사람을 경계해야 길 생활에서 안전할테니)
바나함 요가원에서 종종 뵈었던 요가 선생님이 꼬마친구와 함께 오셨다. 생활관에는 그의 반려견을 미용 맡기시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용하는 편인데 언제 봐도 그의 달콤한 무드는 변함없다. (뭘 과하게 꾸며내지 않아도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다정함이 좋다)
겨울엔 검정색 가죽 소파 자리가 인기가 많다. 난로 앞이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고, 앉았을 때 커다란 책장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정아씨와 성혁씨가 현식씨의 송별회(?? 라고 하기엔 좀 맞지 않지만;;;)를 핑계로 저녁식사 자리를 제안해 주셨다. 일요일은 손님이 빨리 끊기는 편이라 불편한 마음 없이 그들과 함께 생활관에서 저녁을 먹었다. 현식씨가 엽떡을 먹고 싶다고 하셔서 나는 다다다음달의 엽떡을 끌어다 썼다. (2024년의 목표 중 하나는 엽떡은 3개월에 한번만 먹기로......)
밥을 먹다가 신나게 요가 얘기를 하다가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내 얘기에 같은 마음으로 설레며 힘을 더 불어 넣어 주었다.
안된다고, 비현실적이라고,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같이 하자고,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만 해도 즐겁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들 투성이다. 언제부턴가 내 곁에 예쁜 마음을 보여주고, 다정한 말을 손에 꼭 쥐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월 22일 월요일
혼자서 생활관을 지켜야 하는 날. 늘 돌아오는 월요일인데 늘 긴장된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오전 시간을 보내고 서서히 오후의 볕이 생활관으로 들어왔을 때 정인씨도 함께 들어왔다. 정인씨는 요즘 가장 가벼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직 전에 쉬는 기간. 나는 가져보지 못한 시간. (원래 인간은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것을 더 열망한다고 했던가;;) 나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더 부럽다구!!!!!
그는 채식멤버들 사이에서 유명한 향이김밥에서 파는 새싹김밥을 용기에 가득 담아 나에게 주었다. 나는 김밥을 받았으니 그가 주문할 음료를 공짜로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렇게 받았다고 음료나 다른 걸 공짜로 주다보면 서로의 마음이 희석될 것 같았다.
정인씨와 요가 얘기를 또 한참 했다. 그리고 현주님이 오셨다. (나는 왜 정인씨는 씨라고 하고, 현주님에게는 님이라 그럴까?) 현주님이 가져오신 직접 만든 쿠키를 먹으며 나의 불호가 많은 입맛에 대해 얘기했다. (흑임자, 코코넛, 녹차 싫어함......)
2023년에 "현주님 데리고 요가원 가기"를 처참히 실패했는데, 올해 또 도전할 마음은 없지만 정인씨와 모두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요가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끝도 없이 요가 얘기를 하다 정인씨는 내가 수련하고 있는 요가원에서 함께 수련하겠다고, 함께 하자고 했다. 그는 급하게 머리를 감고 오겠다며 요가원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현주님도 떠났고 혼자 남은 생활관에서 나는 변함없이 마감 준비를 서두르고 요가복이 든 가방을 챙겨 요가원으로 향했다.
1월 23일 화요일
(개인 휴무)
분명히 크고 작은 계획들이 있었는데 낮잠을 두시간 넘게 자버렸다. 소소와 아침 산책을 하고, 낮 산책을 가볍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책도 읽을 계획이었고, 청소도 할 예정이었는데 또 밀렸다.
동네 백수처럼 느릿느릿 걸어 요가원으로 향했다. 정인씨가 들어보고 싶다 했던 수업이 있는 날이라 어제에 이어 우리는 또 요가원에서 만났다. 이제는 손님보다 동네친구이기도 동시에 나의 도반들이기도 한 정아씨와 성혁씨도 함께 수련했다. 나는 기분 좋게 수련하고 아주 경건한 사바아사나 시간에 막거리 한사발을 쭈욱 들이키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수련이 끝나고 모두에게 의견을 물었고, 조심스레 선생님께도 여쭤봤다. 너무 좋다며 신난다 하시며 청소를 금방 끝내고 합류하겠다는 말을 하셨다.
우리는 부추전과 막걸리 그리고 골뱅이무침까지 시켜 먹으면서 끝도 나지 않는 요가 얘기를 또 하고 또 했다. 한 낮에 낮잠에게 밀렸던 부질없어진 계획들이, 지키지 못한 계획들이 떠올라 자괴감에 빠졌던 나는 없어졌다. 아주 작은 조각의 성취들이 모이고 쌓여, 땀에 젖어 함박 웃음 짓는 서정민만 남아 있었다.
1월 24일 수요일
모처럼 형진과 함께 오픈 준비를 했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하는 노동은 시간이 몇배는 단축된다. 수요일에는 유독 손님이 없다. 형진과 나는 난로 주변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들을 얘기했다. 결국엔 돈 얘기로 흘러갔지만 ㅜㅡ
마이크와 앰프를 빌려가셨던 AP 대표님이 베이글 샌드위치와 함께 생활관에 오셨다. 무언가를 빌려갔다 가져다 주실 땐 절대 빈손으로 오지 않으시는 분. 오늘은 바로 가지시 않으시길래 차 한잔을 권했고 그 뒤로 한참을 얘기했다. 오시는 손님이 없었기에 거의 처음으로 방해받지 않고 긴 시간 서로의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 대화들 속에 나온 공간에 대한 인테리어 비용. 내가 찾아놓은 레퍼런스 이미지들을 보시곤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비쌀 수 밖에 없는 이미지들을 계속 모으고 있다고.. 아주 대략의 금액만을 추측할 뿐이라며 입 밖으로 꺼내셨는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정도의 돈도 없을 뿐더러, 결국엔 '돈'인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계속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다.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으면 더 멋지겠지만, 그건 또 다른 현실의 문제니까.
대표님이 떠나고 잠시 뒤에 정인씨가 오셨다. 그는 지하철 역 근처에 파는 호떡이 너무 맛있어 보여 사왔다며 인당 2개씩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겨울에 호떡이라니! (팥)붕어빵 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겨울의 군것질거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난로 앞에 모여 설탕이 녹은 꿀 같이 달콤한 호떡 안의 액기스를 줄줄 흘려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시작된 요가 얘기. (아니 정말로 만나면 요가 얘기야;;; 근데 뭐 어쩌겠어. 재밌는걸!!)
실은 정인씨가 오기 전에 AP 대표님이 주신 베이글 샌드위치를 막 먹은 후였다. 그래도 호떡 정도는 가볍게,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었다.
"현주님이 혹시 호두과자 같은거 사오시면 장난 아니겠다"
정인씨가 한 얘기인지 형진이 한 말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정확하게 얘기했다. 잠시 후.....생활관의 뒷문을 열고 들어오신 현주님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호두과자를 꺼내셨다................ 밀가루 대환장 파티를 했다. 아주 흡족한 흡입량이었다.......
1월 25일 목요일
(생활관 휴무)
생활관 휴무엔 보통 꽃 주문을 받지 않는다. 어떤 시즌이나, 나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이 밀린 손님들의 픽업건을 제외하고는 예외는 없었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뭔가 애매한 시간에 꽃다발 픽업을 위해 오전과 낮 시간 대부분은 생활관에서 보냈다. 집에서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충분히 쉬지 못한 기분이었다. 요가 수련하러 가기 전에는 요즘 골칫거리였던 위 아래 분리되는 고양이 화장실을 일체형으로 바꾸기 위해 당근을 해야 했다. 화장실을 교체하고 모래도 전체갈이를 했다. (내 허리 끊어져;;;;)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수련 갈 시간이 이미 다가와 있었다. '좀 더 쉬고 싶은데, 가지 말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걸어가기 귀찮다는 생각뿐. 요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의 끝은 요가다. (가끔 아니 자주 먹는 수련 후의 야식이 진짜 하루의 끝)
1월 26일 금요일
새로운 꽃들을 생활화 진열대에 가득 채웠다. 새 꽃들이 들어온 날 꽃을 사가려는 손님이 있을 때가 가장 좋다. 오늘도 막 새로운 집의 계약서를 쓸 예정인 이웃이 집에 놓을 화병과 꽃을 고르셨다. 나는 (언제나;;)정해진 가격의 양보다 많은 꽃을 꽂아 드렸다. 하얀색 인테리어라고 하셨는데 새파란 델피늄이 추워보이진 않을까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공간에 머무는 이의 취향이 가장 우선이다.
금요일은 손님이 너무 없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생활관 휴무를 하면 참 좋겠지만...)
현주님이 오셔서 애플크럼블 파이와 시나몬 티를 드셨다. 티와 디져트의 조합이 좋다고 해주셨다. 맛있는 걸 자주 드시는 분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은 더 좋다. (근데, 왜 맨날 나는 디저트 만드는 게 이토록 귀찮을까)
현주님이 새빨간 튤립 두 송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하셨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에 중년의 손님 두분이 들어오셨다. 생활관에서 뵌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났다. 커피가 맛있어서 생각나 왔다고 하시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저씨들은 시골로 떠난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하시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아무도 없었기에 스피커폰으로 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남의 대화 엿듣는 건 언제나 짜릿해!)
문 닫기 15분 전에 정아씨와 성혁씨가 오셨다. 배를 두드리며, 입 속에는 이쑤시개를 하나씩 꽂고 오셨다. 그들도 생활관이 제법 편해진 것 같아서 좋다. 정아씨는 나와 형진에게 함께 뮤지컬을 보러가자고 하셨다. 뮤지컬이라니. 잊고 지내던 '문화생활'을 생활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할 기회가 생겼다! 큰 파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일상에 돌을 종종 던져주는 이가 생겼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 사람이 나의 도반이라니.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또" 했다. 감사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부족하지 않게, 따뜻하게 마음을 천천히 전해줘야지.
1월 27일 토요일
수련을 마치고 정아씨가 태워준 덕분에 늦지 않게 오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지난 주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현식씨가 일찍 와서 이미 주차까지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관에서 만나는 횟수는 다르지 않은데 고작 지역을 바꿨을 뿐이라고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출근한 형진에게 생활관을 잠깐 맡기고 나는 밥을 먹고 씻고 다시 출근을 했다. 생활관은 1층과 복층 모두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을 구경하는 엄마과 꼬마 친구,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2층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청년들. 그리고 혼자서 공간을 채워준 가장 멋진 사람들.
나는 음료를 만들고 손님들에게 전해주면서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물었다. 날씨가 추웠을 땐 느껴지지 않던 활기였다.
선하씨가 퇴사 소식을 전하며 그간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풀어주었다.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또 얻은 게 있다 말하는 그는 곧 프랑스로 떠난다. 무슨 말이 필요해!!!! 그거면 충분하지!!!!!
저녁 7시가 넘으면 사람들로 가득했던 생활관은 조용해진다. 밖의 온도도 내려가고, 생활관의 온기도 사라진다. 아침에 함께 수련했던 정아씨가 늦은 저녁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강력하게 단 맛으로 무장한 도너츠를 사서 생활관에 오셨다. 그리고 성혁씨의 누나, 성휘씨는 갑자기 엽떡을 주문하며 함께 먹자고 하셨다. 이로써 나는 2024년에 먹어야 할 엽떡의 횟수를 단 1회만 남겨두고 있다.
큰일이네, 발동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