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형진
그냥 생활, 생각
갈등하지 않는 관계.
적지 않은 연애를 했다. 비교 기준이 없어 많다고는 못 하겠지만 주위에 친구들에 비해서는 적지 않게 연애를 했다. 대체로 갈등 없이 그 흔한 다툼 없이 사귀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서서히 마음이 떠나 헤어진 깔끔한 이별이라 생각했지만 언젠가 싸우지 않는 관계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결혼을 앞두고 고민이 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연인과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싸워본 적이 없어 불안하다고 했다. 이러다가 너무 쉽게 헤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아직 서로의 갈등을 이겨낸 경험이 없어 불안하다고 했다. 그 불안을 앉고 결혼을 한 그 친구와는 각자 결혼 이후 만날 일이 점점 줄었고, 어떻게 지내는지는 인스타그램에 가끔 올라오는 그의 아이 사진으로만 가늠했다. 파트너의 사진도 자신의 사진도 없는 그저 아이 뿐인 SNS였다. 잘 지낼 수도 그냥 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갈등 없는 것이 어떤 불안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곤 그간의 헤어짐의 원인이 이 것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싸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를 온전히 드러내고 날 것의 바닥까지 드러내는 방법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던 것일지도.
갈등을 이겨낸 경험의 부제에 대한 불안함은 수면아래로 깊이 내려앉아 잊고 살았다. 서로 다투고 바닥을 드러내고 다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 따위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어느 날 그저 보기 좋은 모래성 같이 느껴졌다. 갈등 없이 쌓아 올린 관계란 말이다. 물론 갈등이 너무 빈번해서 그런 보기 좋은 모래성조차 쌓지 못하는 관계 또한 많을 것이다. 서로 바닥만 드러낸 채 그 생체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멀어진 관계도 많을 것이다. 너무나 보기 좋은 연인 혹은 관계가 한순간 소리 없이 무너졌다면 어쩌면 갈등의 없었던 것이 이유일지 모른다. 서로를 드러내지 않은 채 보기 좋게만 유지된 관계는 너무나 허술해 보인다.
요즘 결혼 10년 차의 아이 없는 부부의 이상적인 일상이란 뭘까를 고민한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이 생활에서 어디까지 따로 생활하는 영역이고 또 어디부터 함께 생활하는 영역일까 그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졌다. 밥은 몇 번이나 같이 먹어야 할까?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는 기다렸다 같이 봐야 할까? 함께 공통된 취미를 만들어야 할까? 서로의 다른 생활방식을 호기심 있게 보던 몇 년이 지나 이제는 다름이 익숙해진 10년 차의 부부는 어떤 일상을 보내야 할까? 대체로 아이를 중심에 둔 생활방식뿐이라 둘 뿐인 10년 차 부부의 일상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조사관들이 효과적으로 심문을 진행하려면 용의자가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든지 간에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미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지금 당신 앞에 앉아 있게 된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악하다는 것 하나만은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좋은 조사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재닌이 고객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조언도 핵심은 같다. “판단을 미루세요 대신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 < 다른의견 > 242면
갈등 없이 지내오고 있는 이 생활이 안정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파도라도 밀려들어오면 큰 노력 없이 쌓아온 모래성이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냥 쌓이는 대로 그러던지 말던지 무감각하게 지내는 부부 혹은 관계가 더 많을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니. 일단 판단을 미루고 호기심을 갖는 것이 10년차 부부의 새로운 출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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