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같았던 설 명절도 드디어 끝났습니다. 다들 숙제는 잘, 무사히 치루셨나요?
생활관의 주간 정산에 대해 고민을 "또" 하고 있는 시기라 어떤 정산을 할까 골똘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다 설에 들었던 머리 혹은 가슴에 꽂힌 문장을 기록하고, 생각을 쓰면 그것 역시 정산이니까 이번 레터에는 문장을 몇개 담아 볼게요.
"내일 아침 떡국은 정민이 네가 끓여라. 7시 30분까지(아침....네, 아침이요) 넘어와."
형진의 어머니께서 설 명절에 만나 제게 하셨던 말 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먹을 떡국을 끓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 그걸 '<시> 자가 들어간 사람들을 위해 끓여야 한다면 괜히 하기 싫어지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죠. 며느리도 사위처럼 대접을 좀 받아보고 싶은데, 그게 또 어디 쉽나요.
위의 말만 보면 굉장한 시집살이를 한다고 느낄 누군가도 있겠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시집살이를 할 수도, 시킬 수도 없어요.
저는 그에게 "제가 아침에 떡국 끓이려고 결혼한줄 아세요?" 라고 말 하고 싶었던 순간도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하지는 않았고요. 서로가 바라는 며느리상, 시어머니상이 다르다는 걸 시간이라는 처방약 속에서 조금씩 깨닫고 있어서요. 우리는 절대 같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저와 형진이 굳이 저희의 라이프스타일을 그들에게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맞추는 게 어렵지 않으면 맞춰드리자 생각했고요.
요즘 저는 형진의 어머니를 파트너의 어머님으로,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와 다른 타인으로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입니다. 오히려 과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속 마음을 숨기고 괜찮은 며느리인척 했던 시간들보다 더 편안해졌습니다. 이번 명절에 저 혼자서 만든 미션이 있었는데요, 바로 시가에서 떠나오기 전 <시어머니 꼭 안아드리고 오기> 였습니다. 미션은 당연히 성공했고요, 어머님도 무척 좋아하셨어요.
저는 그를 여전히, 아직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나와 함께 오래 오래 지낼 나의 파트너를 있게 해준 고마운 분, 대단한 사람, 나와 많이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려고 생각해요. 흉 보고 싶으면 조심히, 조용히 나의 분풀이를 가까운 이들에게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풀어버리면 그만이더라고요.
생각을 바꾸니 과거엔 착한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는 스스로가 못된 며느리인것 같아 무척 자갈밭 위를 맨발로 걷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모든것이 많이 편해졌고 작은 잔소리에도 커다란 파도가 쳤던 제 마음도 꽤 튼실한 맷집이 생겼습니다. 이게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또 그럴 수 있겠죠.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제가 저 스스로 대견합니다. 그랬던 설 연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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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이는 그 때부터 페미 경향이 있었구나?"
설 연휴때 만난 형부가 제게 한 말입니다.
이 말이 나온 맥락은 대략 이렇습니다.
2남 6녀의 집, 장남에게 시집온 엄마가 아빠의 본가에서 명절 때마다 겪는 극한의 불균형 노동을 보면서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고모들을 향해 사자후를 날린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였어요.
가족이 많았던 저는 명절의 기억들이 대부분 또렷합니다. 분명하고 선명한 기억 속에 가장 짙은 건, 엄마의 노동이었어요. 엄마는 할머니네 부엌에서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떠나지 못했어요. 음식 준비를 했고, 식구들이 먹을 밥상을 차렸고, 그걸 또 치웠어요. 그리고 정리를 다 마치면 다음 끼니를 위해 음식을 하고, 밥상을 차리고를 반복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일 하는 사람은 '며느리'라고 불리는 단 둘 뿐인게 너무 이상했고, 조금 불편했어요.
"고모들은 왜 앉아만 있어? 왜 우리 엄마만 일해? 우리 엄마는 같이 밥 먹으면 안돼?" 라고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며 얘기했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 고모들의 당황했던, 그래서 버벅거렸던 대답들도 어렴풋하게 기억나고요.
그런데요,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제 생각을 말하는 게 '페미'인가요?
형부에게 그 얘기를 듣고 그 당시에는 웃으며 넘겼는데, 집에 오는 길 내내 설명할 길 없는 불편한 감정들이 계속 싹텄어요. 그러다 페미니즘에 대한 사전적 설명을 찾아봤어요.
feminism : the belief i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equality of the sexes.
(저는 영어표기로 쓰이는 단어들은 영어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찾아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언어로 한국어 의미를 생각하고 그게 정립되면 한국어 사전을 찾습니다)
페미니즘은 결국 " 동등함" 혹은 "평등" 에 대한 믿음인데, 전혀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는 왜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저 스스로조차도 '페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좋은 의미, 느낌보다는 희미하게라도 부정적인 분위기를 먼저 감지해서 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저는 아빠도 일해라, 할아버지도 일해라, 작은아빠도 일하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놀고 있는 고모들을 향해 말한 것 뿐이었는데 그걸 들은 형부는 왜 '페미'라는 단어를 굳이 골라 제게 말했던 것이었을까요?
사실, 이렇게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답을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글로 이렇게 정리를 하며 적어 내려가니 답을 찾았습니다. 형부에게 '페미'란 자신의 생각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눈치껏 참는 것을 택하는 것보다 '할 말은 하는 사람'을 싸잡아 얘기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아, 딸을 키우는 형부와 페니미즘을 주제로 좀 더 다양하고 깊은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 저는 저만의 언어를 더 견고히 하기 위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
생활관의 이웃들도 자신만의 언어를 꼭 찾으세요. 우리 같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삶을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