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9 웹에서 보기 Essay 01. 오랜만에 아버지가 안산에 볼 일이 있다며 올라오셨다. 낮에는 볼일을 보고 돌아와 저녁이면 술을 위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노년에 접어들며 조금씩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시는지 웬만하면 술을 드시지 않으려고 한다지만, 평소와 다른, 자식네 집에 와서는 꼭 술을 드시고 잠에 든다. 그래야 새벽에 잠을 깨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저녁식사를 겸한 술을 마시다가 “아버님은 투표 정하셨어요?” 정민s가 물었다. 정치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의 조정(분배)을 위한 것인데 그 안에 사람은 필요 없다는 듯 내뱉으면 안 되는 (불편한) 주제가 된 것 마냥 느껴진다. 언젠가 독서모임을 꽤 오랫동안 했던 분이 ‘정치 관련 책을 선정하고 싶은데, 한 번 했다가 참여하신 분들끼리 꽤 불편한 감정만 드러내다 끝나서 머뭇거려진다.’고 했다. 어느 교회에서도 신자들끼리 정치 얘기가 나오자 결국 몇몇은 주먹다짐까지 갈 뻔해서 ‘더 이상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뿐 아니라 ‘가족끼리 정치 얘기하면 싸운다'는 얘기는 흔히 듣는다. 마치 정치얘기는 반드시 주장과 주장이 맞붙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청률을 위한 자극적 TV 토론의 영향이다.) 아버지는 정민s의 얘기에 ‘이재명이는 안되고, 윤석열이는...’ 말끝을 줄이셨다. ‘정권교체는 하긴 해야 하는데'라며 뒷말을 이어가다 또 머뭇거리셨다. “정권교체는 왜 해야하는데?’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잘한 게 없으니까, 퍼주기만 하고 그 세금은 누가 감당하는데, 그리고 거기는 북한이랑만 뭘 해보려고 하고 완전 운동권들이야" 어느 보수 패널이 이야기하던 스크립트를 복붙해서 말씀하셨다. 주입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세상에 다양한 의견이, 생각이 있을 것 같지만 가끔 그렇지도 않은 듯 느껴질 때도 종종 마주한다. 언젠가 북클럽에서 MZ세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대해 한 20대 참여자는 “저희는 부모 세대보다 잘 살 수 없잖아요. 열심히 일해봤자 집도 못 사고.’ 이 역시 꽤 자주 미디어에서 접하던 이야기다. 좀 더 개인적인 생각을 듣고 싶었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사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가 얘기하는 부모 세대와 사회 초년생인 그 세대 사이에 있는 나의 세대는 (사실 MZ 세대 분류에 따르면 나 역시 그 세대에 포함이 되긴한다.) 어땠나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일을 해서 부모 세대보다 더 돈을 많이 벌 것이라 생각을 했던가,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면 몇 년 뒤에 얼마의 돈이 생기니 집을 살 수 있겠구나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살았던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부모보다 더 잘 살지, 집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력하며 살면 나아지겠지 막연한 기대로 살았던 듯싶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같은 미디어의 헤드라인이 그 막연한 기대를 꺾고 확증된 결과마냥 주입시켜 놓은 것 만 같이 느껴졌다. (근데 이미 많은 성장을 일군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살아야만 하는 건가? 끝없는 성장만이 유일한 방법인 듯 얘기하는 경제지표 같은 관점인 듯싶기도 하다. ) 아버지는 ‘왜 파란당보다 빨간당이 더 잘 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선출직 공무원 출신(지자체장) 대선후보보다 시험 보고 들어온 특정직 공무원 출신(검사) 대선주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말씀은 없으셨다. 그냥 정권은 교체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셨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 채. 결국 ‘뽑을 사람이 없다.’로 결론을 흐릿하게 남겨두셨다. 다음날엔 아버지를 데리러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어머니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권교체', ‘운동권, 좌파', ‘부동산'으로 시작해서 ‘그래도 검사까지 지낸 (똑똑한) 사람이니 잘 하지 않을까.’로 얼버무렸다. 사실 두 분 다 (그나마)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는 후보가 따로 있는 듯싶었지만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으니 될 사람을 찍어야지’라고만 했다. 이 역시도 흔히 듣는 말이다. 사(死)표 말이다. 만약에 A라는 후보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혹은 B라는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A를 찍었다면, A라는 후보는 어떤 이유로 자신을 찍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지지 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모든 유권자가 자신이 (반드시) 지지하는 후보만을 찍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지하는 후보를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면 무효 표를 행사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기껏해야 십여 프로 정도의 얕은 지지율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그 당선자는 기껏해야 국민의 십여 프로의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나머지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그럼 안될까? 사실 지지 받지 않았지만 어부지리로 표를 받아 지지 받았다는 착각으로 (과욕을 부리며) 시작하는 당선자보다 낫지 않을까. 왜 당선될 것 같은 사람을 찍는 것은 투표고, 당선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찍는 것을 사표라고 생각할까. 사표는 귀찮아서 혹은 관심 없어서 투표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사표일 텐데. (투표할 사람을 결국 찾지 못해 투표소에 가서 무효 표를 제출하는 것도 의사 표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다. 미리 생각해 볼 수 없다고 당장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인 것 마냥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면 나도 모른 채 그 말이 마치 내 생각 같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런 것이 반복되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결국 누군가의 아바타 정도가 된다.) 진화라는 것이, 퇴행이라는 것이 몇 세대를 걸쳐서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어떤 기능은 진화를 하고 어떤 기능은 퇴화를 한다. 생각의 진화는 이렇게 생각한다. 혼자서 사유하는 것 너머 계속 입에서 입으로 오르고 내릴 때, 그래서 주장과 주장이 부딪혀 갈라지는 것이 아닌 의견과 의견이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하는 것 아닐까란 생각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생활커뮤니티’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들을 고민하며 언젠가 정치 시즌에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 할 것인지, 국회의원, 시의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대화해 보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모여 자신의 생각을 가진 채 각 정당의 관계자를 초대해 방송 같은 정형화된 토론이 아닌 서로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여전히 기획은 유효하지만 어느 독서모임주최자의 말이, 어느 목사의 경험이 (’아직은 때가 아니야’ 라며) 주저하게 만든다. 이 레터를 보내는 다음 날인, 3월 4일(금)부터 5일(토)까지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4일 오전, 사전투표소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떤 후보에게 투표를 할 것인지 이미 정했기 때문이다. 누가 당선이 되더라도 사실, 개인적으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 정치가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기대는 갖고 있지만 사회(society)보다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누군가가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갑자기 전쟁을 일으키거나 조지 오웰의 <1984>같은 디스토피아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년 뒤 다시 선거는 돌아오니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누군가 다시 촛불을 들 것이고 우리는 그 옆에 함께 서있으면 되겠지.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27년이다. 20세에 대선 투표를 하고 100세에 마지막 투표를 한다더라도 (개헌이 되지 않는다면) 최대 16번이다. 남의 생각이 아닌 나의 생각으로 투표를 하길 바란다. 지지율이 1%도 나오지 않는 후보라도 나의 생각과 맞는다면 한 표로 지지를 보내면 어떨까 싶다. 투표는 밀어주기가 아닌 의사 표명이다. Essay 02.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의 일정한 공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인 경계선인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가지고 있다. 퍼스널 스페이스
(Personal Space)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의 거리다.
-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 문화 인류학자 - 지난주 친구가
가게에 잠깐 놀러 왔다. 그 친구와 나의 가장 커다란 교집합은 ‘사람들의 관심과 오지랖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와 ‘호기심으로 포장한 무례함’에 대해 늘 할 이야기가 쌓여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같은 주제로 격한 공감과 함께 대화를 이어 나갔고 친구의 입에서는 이런 단어가 튀어나왔다. ‘Personal space’ 굳이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사적인 공간’ 일 텐데 한국 정서까지 추가해 넣자면 ‘관계에서의 적당한 거리’로 풀어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물리적, 심적 거리감이 유지되지 못하는 것에 비교적 예민하다. 관계를 쌓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거리감이 달궈진 팬 위에 올려진 버터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버리는 그런 것 말고, 다짜고짜 들이미는 그런 것 말이다. 이럴 때면 고양이의 습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개냥이 제외)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피고 관찰하며
상대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낯선 이가 갑자기 등장하면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기거나 공격이 감지되면 몸을 커다랗게 부풀리는 것. 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도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을까?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범죄를 보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좀 더 주변을 세심히 살펴야겠다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지나친 관심으로 중간 정거장 없이 직행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이런 사람들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왜”를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내가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알려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는 선 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선”이라는 게 있는데 그 선의 경계가 넓고 좁음의 차이인가? 그렇다면 나는 ‘personal space’라고 하는 자기만의 방이 좁고, 좁아서 문도
하나뿐인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뿐인 문에 또 작은 구멍을 뚫어 내 방에 들어오려는 자가
누구인지 계속 살피는 사람인 것이다. 하,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화병꽂이 no.09 3월, 봄이
가깝게 다가온 것 같은 날씨에 다시 만났네요 우리.
(간질거리고 오글거리는 연애 초반의 커플에게서 들을
법 한 시작하는 글.) 시간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도 상대적인 느낌이라 와닿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빨리 흐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천천히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도 하니까요. 저는 핑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건 옷을 입을 때 블랙과 그레이만 골라 입어서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합리화를 했었던 거죠. 꽃은 다르죠. 핑크는 진리. 실패하지 않는 법! 밝은 레드와 버건디 석죽을 놓고서 어떤 컬러가 튤립과 스위트피를 잘 받쳐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좀 더 경쾌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고른 밝은 빨강의 석죽. 소재를 섞지 않고, 3가지 꽃으로만 꽂았어요. 혹시라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 이 사진을 보고 마음이 동했다면 집 근처 꽃집으로 달려가 딱 이만큼의 꽃만 사서 화병에 꽂아보세요. 꽃은 보는 것도 좋지만(물론 누가 사 줄 때가 제일 좋지만), 직접 꽃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가며 꽂는 것도 굉장한 기쁨을 선사해 줄 거예요. 생활화의 이웃들은 그 기쁨을, 그 순간의 몰입을 꼭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생활책 정치 혹은 국가 같은 주제의 책을 소개할까, 생활관 서가를 두리번거렸다. 민주주의를 다룬 책을 소개할까, 아니면 여러 지도자를 정치가를 다룬 책을 소개할까 고민을 했다. 그런 책을 두리번거리다 결국에는 나의 개인적인 철학 혹은 나의 생각의 중심을 만드는 것이 먼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다움을 고민할 수 있는 책을 소개하는 것이 지금 당장보다는 앞으로 삶을, 좁게는 2027년에 있을 대선을 준비하는 작은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다움'이란 것은 뭘까? 이 번에 추천하는 생활책은 지난주에 추천한 강상중 교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과 조금 같은 결이라고 생각 들지 모르겠다. 언제 꼭 한번 읽고 모여 대화하고 싶은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자기결정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지음, 은행나무 펴냄, 2015)
부제: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겨나거나 작용하는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선과의 대결이 자기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p.36 ‘어떻게 살 것인가?’란 주제로 2011년에 3일간 열린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 글이다. ‘자기결정', 결국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 행복하고 존엄한 삶이라는 것인데, ‘적게 먹고 운동하면 살을 뺄 수 있다.’같은 말이다. 누가 모르나? 그런데 세계적인 철학 석학이, 거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같은 베스트셀러 문학작품까지 집필한 그가 설마 그 당연한 걸 말하려고 강연을 하고, 책까지 썼을까. 사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 작가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김영하 북클럽'을 통해 알게 됐다. 꽤 얇은 책으로 함께 읽고 대화해도 부담스럽지 않을 듯해 언젠가 북클럽에 써먹어야지 쟁여놓고 있는 책이다. 셀프 브랜딩, 나다움 같은 것을 찾아야 할 듯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나다움’ ‘자기결정'그런 거 어떻게 하는 건가? 혼자 골방에 앉아서 생각만 해봤자 결국 나는 사라지고 ‘나다움'을 찾았다는 사람의 편집된 인생만 기웃거리며 따라다닐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혼자 골방에 들어가야겠다면 그전에 이 책을 먼저 읽고 들어가길 추천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골방에 가지고 가야 할 것이 꽤 많아 질지도 모른다. ‘나다움'을 통한 ‘자기결정'은 결국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어떤 관계 속에서 경험을 통해 호불호가 생기고,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문학을 통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같은 생각을 통해서 서서히 구축되는 것이다. 아직 숨은 보석처럼 발견되지 않은 ‘자아'를 가진 분들에게 추천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나다움'의 자기 철학을 쌓는 법을 발견한다면 5년 후 대선 때 혹은 그 이전 다양한 선거에서 현혹되지 않은 한표를 당당하고 후련하게 찍고 나올 수 있을 지 모른다. 생활[이슈]클럽 “이번주 레터는 함께 생각해볼 주제가 많아서, 무척이나 좋았어요 :) 기회가 된다면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 지난 일곱 번째 뉴스레터를 보고 이런 의견을 남겨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도 그런 토론의 장을 언제나 기대하며 생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초반에 [생활이슈클럽]이란 이름으로 각자 한 가지 질문 혹은 사회 이슈를 가지고 만나 대화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으나,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곧 이슈 클럽을 재계하려고 기획 중입니다. 그전, 일단 저의 이슈를 하나씩 짧게 공유를 하면 어떨까 싶어 마련한 새로운 코너입니다. 매주 한 가지 개인적으로 던지고 싶은 이슈를 공유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economy/it/1033090.html 생활소식 마을상점생활관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합니다. 선데이모닝필사클럽 3월 3월의 선데이모닝 필사클럽 마감되었습니다. 일요일의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생활북클럽 ] for. LIFE 3월 총 두번의 자리가 격주로 마련되는 북클럽 멤버를 모집합니다. LIFE. 좀 더 나은 일상을 위한 책을 통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첫번째 지정도서는 <전념>입니다. 몰입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경험만, 탐색만 하는 생활습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생활습관을 돌아보고 어떤 것에 전념을, 몰입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대화의 자리로 마련이 됩니다. 두번째 도서는 첫번째 만남에 모인 멤버끼리 함께 논의해서 정합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멤버를 만나 의외의 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최소 인원이 충족되어 진행이 확정되었습니다. |
마을상점생활관의 두 호스트의 생활의 관점을 담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