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 발행일시를 금요일 아침 7시로 옮기고 난 뒤 목요일 늦은 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화면을 바라본다고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바라보며 예전에 봤던 이슬아 작가의 다큐(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관찰 카메라같은 것이었다)의 한 장면을 떠올려봤다. 한창 '일간 이슬아' 발행으로 글 구독서비스의 한 획을 굵직하게 그었던 유명 작가도 발행1시간 전까지 쓸 글이 떠오르지 않아 계속 자리에 앉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던 그 장면. 나는 이슬아는 아니지만 어쨌든 매주 글을 쓰고 발행하는 사람이니까 뭔지 모를 희미하고 가느다란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쓸 말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나 길게 하다니.....)
자의 타의 뭐 그게 중요하겠냐만 어쨌든 목요일 밤의 루틴은 이렇게 모니터 앞을 지키고 앉아 소담이(401호 돼지 고양이)의 엉덩이를 이리 저리 치워가며 글을 쓰는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잔잔한 일상을 영위하는데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것일까? 지난 필사모임에서 '풍요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나와 도반들은 자연스럽게 적당함을 넘어 지나치게 과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서 무의식 혹은 중독적으로 섭취하는 필요 이상의 것들을 나열하며 각자 하나씩 끊어보자 얘기했고, 그 끝에 모두 '밀가루 한달 끊기' 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떡볶이, 칼국수, 라면, 과자의 섭취만(만?? 만??) 제한하면 될 것 같았다.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한달인데 이것도 못해낼까 싶어 호기롭게 도전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던 건, 앞서 나열한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것보다 의외의 것들에 밀가루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먹으려다 먹지 못하게 되는 상황들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예를들면, 파스타 샐러드를 먹으면서 파스타 면이 밀가루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보리 강정이라고 먹으려 했다가 성분표를 살피니 밀가루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다시 내려놓게 되는 것 등등.
다행히 좋아하는 떡볶이와 칼국수와 라면이 엄청나게 먹고 싶어서 한달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다.(정말 다행이다. 이번 한달 챌린지가 끝나면 엽떡을 먹고 로얄냉면집으로 달려가 칼국수를 먹어야지!!!!!!) 이번 도전은 '절제'를 할 수 있는가? 내 삶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스스로 '제거'하며 살 수 있느냐의 첫번째 테스트라고 생각한다. (아직 테스트 20일 더 남았음)
정확히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땐 부족한 걸 채우기 급급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비우고 그게 사는 공간이든 마음의 공간이든 몸이든 어느 곳이라도 빈 공간을 마련해 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이 자주 생각난다. 나도 이제 '중년'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기도 해서일까 요가 수련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채우는 일보다는 비우는 일에 더 힘을 싣고 있다. (물론, 채우고 싶은 것들도 여전히 많..........)
물질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인 것 역시 누군가는 아직 힘을 줘야 할 때라고 말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자꾸 힘을 빼고 있다. 사실 힘을 빼는 것과 집착하지 않고 비우거나 내려놓는 것이 동일선상에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아주 커다란 원 안에서는 "힘좀 빼" 와 "내려 놔, 그만" 이 같이 손 잡고 있는 느낌아닐까?
밀가루 먹지 않기를 시작했을 뿐인데 먹거리와 먹는 행위에 대해 더 이상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채식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역국과 뭇국에 소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다는 것, 김치볶음밥에 '달걀 후라이'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릭요거트를 두유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는 것.
당연하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틈을 만들고 균열을 일으켜 틀을 깨는 것.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행동하는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일어나지 않으니 바뀌지 않았고, 바뀌지 않으니 제자리였다.
조금씩 나아간다는 감각과 생각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 걸 인지하는 나 자신.
이런 내가 아주 가끔은 대견하다.
(자의식 과잉으로 글을 끝마치려니 좀 부끄럽고 우습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