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 Host 정민의 주간 정산
6월 19일 월요일
주말동안 텅 빈 냉장고를 채워야 한다. 하필 혼자 생활관을 지키는 요일에 할 일이 많다니, 효율성 떨어지게 일하는 나는 괜히 더 마음이 바쁘다. 브라우니를 굽는 동안 당근 라페를 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오일이 또 떨어졌다. 잠깐 하던 일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럴 때 손님이 오면 더 엉키는데 제발 내가 할 일을 다 마칠때까지 손님이 업길 바랐다. 다행히 이번에 신은 나의 편이었다. (이거, 좋아햐 해 말아야해;;)
오랜만에 손님이 없는 상태가 길게 이어졌다. 덕분에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잘 마쳤다. 냉장고가 두둑해졌다. 그런데, 하필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5년차가 되니 기계들이 이제 조금씩 손 볼 일이 생긴다. 손님 중 한 분이 냉장.냉동 설비쪽에 계셔서 도움을 요청드리고 다시 고요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정인씨가 질문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일찍 생활관으로 왔다. 글쓰기 클럽 멤버들과 서로 존대가 아닌 평어를 쓰기로 했다며 "득영에게 가장 손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귀여운 걱정을 하며 내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벌써부터 득영이라 부르면서 걱정을 하다니. 내 눈에는 이 사람들 죄다 귀여운데, 그걸 아실랑가.
수빈씨가 회사에서 지쳤다며 함께 나눠 마시자고 비타500 한박스를 주셨다. 사람은 저마다 피로를 푸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쁜 사람. 나도 예전 회사 생활할 적에 열받으면 그렇게 후배들 몽땅 데리고 가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사줬던 게 생각났다.
6월 20일 화요일
(개인 휴무)
나의 마음을 괴롭게했던 리트리버 친구는 결국 안락사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렇게 되었다. 씁쓸하고 쓸쓸했지만 생판 모르는 곳에 가서 홀로 고통속에 생을 마감하는 것 보단 오히려 잘된 거라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해봤다.
6월 21일 수요일
새롭게 바뀐 각자의 스케줄대로 일 해보는 첫 날이다. 내가 오픈을 하고 12시에 1차 퇴근을 한다. 약 3시간 뒤 다시 2차 출근을 해서 마감까지 근무는 이어진다. 직주근접을 용이하게 이용하는 셈. 낮 시간에 생긴 3시간 동안 공복 상태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40분 정도 한 뒤 샤워를 하고 첫 끼를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도 시간이 남는다. 오늘은 조금 느긋하게 늘어졌었는데, 이 여유 시간에 낮잠을 40분 정도 자도 좋을 것 같다. 일상에 다시금 틈을 만들어 새로운 걸 넣었다. 조금 활력이 돈다.
오후 3시가 넘어 2차 출근을 했더니 현주씨와 병훈씨가 각자 자신들이 자주 앉는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내 가게지만 그들이 채워주고 있으니 마치 내가 환영받는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강아지 4마리와 함께 오신 부부를 생활관에서 처음 마주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예쁜 멍멍이들을 가족으로 들이고 함께 사는 삶이 그저 행복하기만 한건 아닌걸 아는 잘 안다. 하지만 또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그들에게서 받을 거라는 것도 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랑.
6월 22일 목요일
(생활관 휴무)
쉬지 못하고 부천에 업무차 다녀와서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음. ‘우와, 나는 쉬는 날 일하는 거 정말 싫어하는 구나. 다른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정말 싫어하는구나.’ 를 다시금 깨달았다.
6월 23일 금요일
신유진 작가님께서 추천한 이주란 작가님의 <별일은 없고요?>의 북클럽이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고 마지막 분량의 당근 라페를 꺼냈다. 아, 이런.....수빈씨가 퇴근하고 바로 왔다며 샌드위치를 주문하셨다. 아아아아...안녕, 당근 라페. 잠깐이지만 반가웠다. 다른이의 입을 행복하게 해주렴.
북클럽이 늘 재밌고 좋지만은 않다. 별로인 책도 있고, 별로인 분위기도 있지만 오늘의 북클럽은 따뜻했고 새로웠다. 이 책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클럽 멤버들에게 나는 이 구절이 좋았고, 이래서 이 책이 좋았다 얘기하면 멤버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해준다. 다시 읽어보겠다며 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큰 지지를 받는 것 같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소와 산책을 하다 만난 득영씨.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셋(소소, 나, 형진)을 보고 뛰어 따라왔다며 반가움과 거친숨을 함께 내뿜었다. 득영씨를 볼때면 소설 소나기 속 주인공 소년이 떠오른다. 내가 보는 그는, 나에게 보이는 그의 모습은 청량하고 순수하다. 투박함 속에 예의바름이 숨어 있고,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할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철부지 소년같다.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나와 그는 어쩌다보니 호스트와 게스트로 만나 안부를 묻고, 책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글을 쓰는 사이가 되었다. 생활관이 아니었다면 인연이 되지 않았을 사람. 작은 공간 속에서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도 만났다. 아니, 만나고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아침 8시에 생활관 옥상에서 감자와 당근을 수확했다. 미친 강행군. 하지만 더 늦게 할 수는 없었다. 여름이니까!!!!! 옥상에서 우리가 키운 감자와 당근으로 전을 부치고 삶은 감자를 으깨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다 함께 먹었다. 물론, 시원한 생활관으로 복귀해서.
조금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텃밭을 일궈 좋아하는 감자를 수확해보니 이 정도 자급자족은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건방지네 참나)
모객이 적게 된 신유진 작가님의 북토크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좋은 작가님을 모셔놓고 적은 인원이라니. 괜히 죄송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아주 잠깐이었고, 작가님과 참여한 독자분들과 이웃들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가오는 가을에 작가님이 살고 계신 익산으로 투어를 가기로 결정했다. 미니 버스를 빌려 소소도 함께, 다 같이 익산으로 가 작가님에게 마이크를 채우고 가이드 삼아 익산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런 작당모의는 소수의 인원이 모였을 때만 가능한 거겠지. 그래, 오히려 좋아!
고여있거나 잔잔하게만 일렁거렸던 나의 일상에 숨실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익산 투어 계획 하나만으로. 이런 작은(?) 이벤트들이 종종 있어준다면 인생이 지루하지만은 않겠다.
6월 25일 일요일
오전에는 나의 본업(이 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구별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인 플로리스트로 돌아갔던 시간 이었다. 나의 꽃 선생님의 지원 요청에 신용산 스튜디오로 달려가 대만, 홍콩, 중국에서 온 수강생들을 만났다. 비록 보조 강사로 간 거라곤 하지만 3시간 넘게 열정적으로 수업을 함께 했더니 체력은 바로 방전되었다. 아니, 진짜 체력 어쩜 좋아? 결국 퇴근길 지하철에서 졸다가 눈 떠보니 중앙역을 향해 가고 있어서 좌절했다.
다시, 생활관 복귀.
예정보다 늦어진 시간에 생활관 마감을 겨우 했다. 어제도 힘든 일정이었는데, 오늘도 힘들었다. 집 나간 체력 돌아오게 만드는 비법은 뭔가요 도대체? (분명히 체력 타령 그만하기로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