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개인적인 글쓰기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다>
어김없이 고양이 알람에 한번, 개 알람에 한번 깬다. 고양이 알람은 새벽 3시 30분과 4시 사이에 주로 울리는데, 너구리인지 고양이인지 이제는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소담이가 밥 달라고 우는소리다. 소담이가 자기가 총대를 메고 소이 몫까지 우는 것이다.
”냐아아아아아, 냐아옹. 그아아아아아옹, 까웅, 까아아웅. 호응, 홍.“ 대충 이런 소리를 1분 넘게 계속 들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눈은 반만 뜨고 침실에서부터 거실까지 가로질러 가 돼지 고양이(소담)와 미친 고양이(소이)의 밥그릇을 채운다. 그들에게 나는 인간 자동 급식기인 셈이다. 고양이 알람을 끄는 방법은 사료 알갱이들이 하얀 사기그릇에 떨어지는 ’촤라락‘ 소리를 들려주면 된다. 알람이 꺼진 공간은 백색 소음으로 다시 채워진다. ’까락, 까라락. 오독, 오도독‘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잠에 빠져든다.
분명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이번엔 개 알람이다. 전기 요금 폭탄 투하가 두려워 바람이 조금 부는 날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창문을 열어두고 자는데, 털을 온몸에 두툼하게 휘감고 있는 녀석에겐 지구 온난화에 버무려진 바람 따위로는 어림도 없나 보다. 덥다고, 에어컨 틀어달라는 요구성 헥헥거림의 알람이다. 그 알람은 종종 고양이 알람보다 먼저 울리기도 하고, 늦게 울리기도 한다. 나는 분명 자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헥헥헥헥헥헥헥헥‘ 소리가 들리면 고양이 알람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마치 침대에서 스프링이 솟구쳐 튀어 올라가는 형상이다. 아픈 줄 몰랐던, 그래서 너무 아파 빨리 헤어진 첫 번째 반려견과의 모든 시간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개 알람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다. 대꾸도 없는, 손으로 탁 쳐서 끌 수도 없는 개 알람을 듣고 자다 깬 자갈돌이 섞인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한다. ”소소, 더웠구나? 미안해라. 에어컨 켰으니까 다시 자자아아아. 응?“ 후텁지근했던 공간에 냉기가 돌면 자연스레 개 알람은 꺼지고 다시 모두가 고요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의 밤과 새벽 사이엔 이렇게 두 번의 알람이 울리고, 나는 그렇게 잠에서 두 번을 깨고, 어떤 후회나 짜증이 몰려올 겨를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든다. 깼다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잠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불면증에 시달렸던 과거에는 잠을 못 자서 괴로웠고, 겨우 잠들었는데 중간에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그 괴로움과 고통은 실외 배변만 하는 1견이 내 생활에 들어온 뒤로 완벽히 사라졌다. 아, 물론 요가를 시작한 것도 영향이 있지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실외 배변만 고집하는 개(보통은 중대형견)를 가족으로 들이라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이제는 진짜로 침대에서 자의로 벗어나야 할 시간이다. 내 개(소소)의 첫 배변활동을 돕기 위해 나부터 배변활동을 하고 소담이와 소이에게 방정맞은 배 방귀(귀찮아하는 고양이의 배에 하찮은 인간의 입을 가져다 부비는 행위)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선다.
거주하는 건물 바로 앞에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내 개와 동네 개들의 배변활동을 적극적으로 돕는 곳이다. 소소의 첫 배변이 끝나면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나의 가게로 들어와 소소의 아침을 챙기고, 길고양이 급식소에 밥과 물을 채운다. 그리고 마시는 나의 첫 커피. 정성스레 내리는 커피는 아니고, 배우 조지 클루니의 음성이 떠오르는 네스프레소 캡슐커피다. 아침의 첫 커피는 맛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 새벽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 그 고귀한 행위 말이다. 홀짝이면서 쓰는 일기는 또 어떤가. 일기의 내용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커피를 마시며 쓰는 일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마시며 쓰는 행위가 너무나 좋다.
혼자만의 시간에 취해 쓰러지기 직전, 소소의 요구성 헥헥거림이 다시 시작된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나가자는 뜻이다. 리쉬를 손에 들고 외친다. “소소, 가자! 컴!” 녹아 흘러내린 흐물거리는 콩고물과 떡 사이의 인절미 같은 녀석이 다시 개의 모습이 되어 네발로 나에게 뛰어온다. 이게 뭐라고, 나 따위 인간이 뭐라고 저 해맑은 얼굴을 하며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줄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올까. 소소의 천진난만한,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문구가 하나 있다.
‘이 개를 구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지만 이 개의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문구가 생각날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내 눈동자는 눈물이 차올라 흐리멍텅해진다. 그리고 또 혼자서 생각한다. 내가 소소의 세상을 바꾼 게 아니라,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려고 소소가 내게 온 거라고. 소소가 내 세상을 바꾼 거라고. 내 불면증을 치료하고, 내 무기력함을 책임감으로 지워버린 게 소소니까, 나의 혼잣말이 다 맞다.
혼자서 온갖 청승을 다 떨고 난 뒤 비장하게 산책 준비를 한다. 나를 구원한 이 녀석과 함께 걸으면 따가운 눈총을 많이 받고, 눈총에서 끝내지 않고 입으로 칼을 빼든 사람들을 마주하기 때문에 나도 총과 칼을 준비한다. 방패는 없다. 창만 있을 뿐. 비장한 마음이 실제 전투에 큰 영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투 경험이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입으로 칼을 휘두르면 나도 같이 칼춤을 추면 되니까. 소소와 산책하는 날들의 반 정도는 평화롭고 반 정도는 불편하다. 내 새끼 예쁘네, 늬 새끼도 예쁘다를 남발할 때도 있고, 자동 완성되는 번호처럼 112를 누르고 동영상 촬영을 하며 칼춤을 춰야 할 때도 있는 날들의 반복이다. 우둘투둘한 비포장도로 같은 정겹고 벅찬 산책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와 잉여로움은 벗고, 생활자로 옷을 갈아입는다.
생계를 위한, 그것이 가장 먼저가 되어야만 하는 나의 일터에 들어선 순간 분명히 모드가 바뀌어야 하는데 영 바뀌지 않는다. 계속 마음은 잉여롭다. 그러니 몸도 빠릿하게 움직이는 대신 나무 늘보 보다 조금 빠르게만 움직일 뿐이다.
내가 좋아 시작한 이 일이 왜 생계가 되어야만 하는지 미련하고 답답하고 고상한 고민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과 동물이)이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게 당연한 건데 내가 좋아하는 게 뭐 대수라고 그 ‘좋음’을 ‘돈벌이’에 갖다 붙이기 싫음이 팽배했다. 지금은 그 고결한 마음을 버렸지만 이렇게 바뀌기까지 3년은 넘게 걸린 것 같으니 그 시간들을 괜히 손해 본 느낌이다. 과거의 나에게 하소연해 봤자 돌아오는 건 복리로 불어난 자괴감 뿐이니 그저 입 다물고 청소를 한다.
아침 9시부터 10시 사이엔 하소연 금지 시간이다. 오픈 준비 시간엔 일 생각 외에 모든 생각은 사치다. 배부른 생각 금지. 이 금욕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하면 하루 온종일 오만가지 생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1시간 정도는 무념의 세상에 나를 기꺼이 내던져 본다. 어쩌면 나는 잡다한 생각을 다 할 수 있는 긴 시간들이 있기 때문에 금욕의 시간을 잘 견디는 걸지도 모른다.
패배자 같은 생각, 사이코 같은 생각, 갑자기 성인군자 같은 생각, 또 갑자기 독불장군 같은 생각. 이 모든 생각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건 바쁘지 않은 가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보통 패배자, 사이코 같은 생각을 하고, 휴무가 끝난 금요일부터 주말 동안은 아, 역시나 사이코, 독불장군 같은 생각을 한다. 휴무일인 목요일에만 성인군자 같은 생각을 했었구나.
갑자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은 쉴 때와 일할 때 마음이 이렇게나 다르다는걸.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좀 독불장군 같은 생각을 펼쳐볼까? 어떤 손님들이 와서 나의 신경을 찌를까 기대된다.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