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월요일
일찍 출근해서 오픈 준비를 마친 뒤 샌드위치 재료들을 준비했다. 늘 형진이 만들던 호무스를 처음으로 내가 만들어봤다. 손이 많이 간다, 번거롭다, 그러니 사 먹을 때 비싸더라도 감사하게 먹어야 한다 등의 말을 듣거나 하기만 했지 실제 어떤 순서와 방법으로 만드는지 몰랐다. 실은, 알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만들게 되었지만,,,, 호무스를 만들고, 당근라페를 만들었다. 번거로운 작업을 하는 동안 다행히(?) 손님이 없었다. 장갑을 벗을 일이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상임씨가 왔다. 반찬통에 다구를 들고. 차를 우리는 주전자와 찻잔들이 가지런히 겹쳐져 생활감 잔뜩 묻은 통 안에 있었다. 예지씨와 둘이 차를 내려 마실 건데, 생활관에서 미팅도 있어서 겸사 겸사 오신 것 같았다.
현주님도 우연히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아 함께 차를 마셨다.
현주님이 나가고 하은씨와 승호씨가 왔다. 그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상임씨와 예지씨 나은씨까지 모여서 다음 달 시작될 텃밭 클럽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크게 다를 것 없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과 번개가 쳤다. 무서웠지만 생활관에 혼자 있던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어린아이들처럼 여행 온 첫날밤의 캠프파이어를 하는 기분도 살짝 느꼈다. 디저트를 "또" 만들지 못해 달콤한 걸 먹고 싶다던 상임씨를 위해 예지씨가 폭우를 뚫고 편의점에 다녀오겠다 했다. 이 날씨에 밖에 나가는 건 아무래도 미친 짓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펼쳤던 우산을 접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온 순간 천둥이 심하게 쳤고 가게 구석에서 불꽃이 튀며 인터넷 선이 연결되어 있던 전선에 전원이 나갔다. 음악도 꺼졌고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았다. CCTV 도 먹통이 되었다. 그런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낯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익숙한 손님들과 함께라 괜찮았다.
폭우 속에 잠시 전화를 받기 위해 고양이 급식소 앞에서 비를 피하던 청년에게 우산과 수건을 주었다. 그는 어떤 말도 없이 우산과 수건을 받아 들고 다시 빗속으로 사라졌다. (청년, 우산 갖다 줘. 부탁해.)
8월 8일 화요일
(개인 휴무)
파주에 갔다. 서해선을 타고, 또 경의중앙선을 타고. 박상영 작가의 <순도 100퍼센트의 여행>은 지하철 여행에서 읽기 적당했던 책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지하철도 쾌적했고.
사적인 서점에 들러 나와 친구는 서로 책을 교환하고 먹고 떠들고 울고 웃다 헤어졌다. 안산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저녁 요가 수련을 다녀왔다. 무려 1시간 49분. 선생님은 몸을 못 풀어서 길게 하지 못할 것 같다 말씀하셨는데 뻥이었다. 또 속았다.
8월 9일 수요일
손님이 없던 오후. 태풍 소식에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눈치였다. 금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상록 장애인 복지관과 함께 하는 꽃 수업이 취소되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라고 했다. 그렇지, 안전이 먼저다. 우리는 그동안 몸으로 체득해서 알고 있잖아. 안전제일이다.
늘 버려지는 게 더 많았던 두유 그릭 요거트가 재고 없이 다 판매되었다. 신난다. 잘 팔리는 가게 사장님들은 매일 신날까? 그렇지도 않겠지?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또 있겠지.
8월 10일 목요일
생활관 휴무
재난 상황에 대비해 집에 계속 머물렀다. 집에서 책도 읽고 일도 할 요량으로 백팩이 잔뜩 짐을 챙겨 왔지만 하루 종일 낮잠을 잤다. 요가도 취소되었다. 정아씨에게 말을 전하지 못해 정아씨는 잠긴 요가원 앞에서 잠깐 서성이다 연락을 했다.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다고 사죄의 문자를 보내고 나는 또 잤다. 많이 잤고, 많이 먹었다. 어이쿠.
8월 11일 금요일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손님들이 생활관 문을 열었다. 분명 여유 있게 시작한 청소인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났나 하고 시계를 봤는데 아직 오픈 시간이 되려면 20분이나 더 남았었다. 아마도 생활관 오픈 시간을 잘 알지 못한 채 오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청소를 마치고 새롭게 들여온 꽃을 정리했다. 현주님이 쓰립토메인에 꽂혀서 한 아름 사 가셨다. 생활화를 생활화해주고 계시는 분. 좋아.
오늘은 유독 처음 만나는 손님들이 생활관을 많이 찾아 주셨다. 연령대도 비슷한 손님들. 신기해라.
8월 12일 토요일
아침 10시에는 내가 성덕이 되는 데 한 획을 긋게 해주신 한수희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튤립제과의 스콘을 먹으며 아슬아슬한 합평까지 잘 마쳤다. 나는 작가님의 글도, 말도 좋지만 그의 아웃핏도 너무 좋아한다. 큰 키,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옷차림, 가방 안에서 꺼내시는 손수건과 텀블러. 좋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좋아하는 클럽 멤버들과 웃으며 글쓰기에 대해 얘기를 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다. 2시간 집증해서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말하고, 웃고 떠들다 보면 작가님도, 나도 에너지가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다.
뒷정리를 하고, 잠깐 비는 시간에 밥을 먹고 다시 출근을 한다. 확실히 퇴근이 늦으니, 취침시간도 늦어지고, 당연히 수면시간도 줄어들었다. 낮잠을 자고 싶었다. 잘 수 없으니까 더 자고 싶은 거겠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짧고 굵게 낮잠을 잤다. 또다시 출근한 생활관 2층에는 우디와 세영이가 있었다. 형진은 멈머 친구들 보호자가 물을 요청하지 않으면 먼저 주는 타입이 아니라 혹시나 하고 물어봤더니 역시나 안 줬다고 했다. 얼음 물과 지난번에 둘 다 잘 먹었던 간식을 갖고 2층으로 올라갔다. 보호자님들 중 한 명의 얼굴이 새로워서 인사를 드렸더니 본가에서 온 친동생이라고 알려주셨다. 누가 묻지 않아도 옆에 있는 이를 나에게 소개해 주는 사람. 이런 익숙함이 좋다.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 감정, 익숙함과 편안함.
토요일 밤, 마지막 손님은 정아씨와 성혁씨와 그의 누나였다. 헤어디자이너인 누나가 (누나, 이름 몰라서 죄송합니다) 새롭게 바뀐 나의 헤어스타일을 극찬해 줬다. 얼굴이 주먹 만하다며 주먹을 쥐어 보여주셨다. 살이 계속 성장기 어린이처럼 찌고 있어서 신경 쓰였는데, 살도 빠진 것 같고 얼굴도 작아 보인다니 괜히 우쭐해졌다. 아니 왜? 뭐에 우쭐하냐고, 참 나. 그리고 바로 누나는 채찍을 주셨다. 뽀글거리는 펌을 했다가 한 달 뒤 바로 매직으로 펴버린 내 머리카락의 끝이 다 탔다는 것이었다. 샴푸도 겨우, 선크림도 겨우 바르는 나에게 트리트먼트가 무슨 말이더냐. 옆에 앉아 있던 정아씨도 거들었다.
“정민 사장님, 선크림도 겨우 바른다고 하셨어. 트리트먼트는 무리일 것 같아요....”
누나의 마지막 처방은 상해버린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미용실에 갈 타이밍이 되었는데 누나의 회사가(미용실) 어디인지 물었지만, 신도시라는 대답에 다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주한 뒤 미용실은 무조건 집에서 10분 이내의 거리로 찾고 있는 나에게 신도시는 잔인하게 멀었다. 정봉이(내가 다니는 단골 미용실 반려견 이름이다)네랑 의리 절대 지켜! 다음 주에 미용실 가야겠다.
8월 13일 일요일
소소가 아침 산책 때 다리를 절뚝여서 계단을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게 무리일 것 같아 생활관에 두었다. 계속 CCTV로 소소가 어떤지 보다가 일찍 출근했다. 셔터를 올리자마자 소소가 튀어나왔다. 다리가 괜찮은지 확인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받으려고 서둘러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니 바로 끊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문을 보니 손님이 서 계셨다. 아마 전화를 하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시고 끊으신 것 같았다. 손짓으로 아직 안 열었냐는 의미의 X 자를 그리셨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어드렸다. 오후 3시부터가 운영시간인데, 일찍 오셨다고 말씀드리니 바로 대출로 책 대출해가려고 오셨다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땐 열려 있어서 비슷한 시간에 오셨다는데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컴퓨터가 켜질 동안 손님께 여름 동안의 운영시간이 변경되었다 다시 말씀드렸다. 그러고 나서 어차피 오픈 준비를 하니 일찍 열려 있을 땐 들어오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땐 더워서 힘드니까 시간 맞춰 오시라고 에둘러 마음을 표현했다.
아침 일기에 오늘 하루의 의도를 ’다정함‘으로 적었던 게 생각났다. 나에게도 다정해야지 생각했다.
청소기를 돌리는데 소소의 털이 아닌 털이 2층에 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어여쁘게 생긴 세영이의 털들이었다.(아마 우디 것도 있었겠지?) 빠져있는 털들을 청소기로 빨아들이면서 어제 봤던 세영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밥을 잘 먹지 않아 갈비뼈의 윤곽이 드러나는 세영이의 몸통도 생각났다. 또, 다음에 만날 땐 포동 포동 해져 있길 바라며 청소기를 열심히 돌렸다.
잠깐 계시던 어른 손님과 꼬마 손님이 나간 뒤로 다시 조용해진 생활관.
징검다리 연휴라 돌아오는 주에 근무와 휴무를 조정했다. 나는 수요일에 쉰다. 아, 아득히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