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 Host 정민의 주간 정산
10월 15일 일요일
작은 일정들이 시간 사이사이에 있는 날이다. 오후 5시에 시작되는 북토크는 끝나는 시간을 생각하면 좋은데, 생활관을 운영할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어서 선택을 했지만 늘 아쉽다. 두 개 다 가질 수 없으니 선택한 뒤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인간이니까. 생각을 짧게 하는 연습하기!
경기도 콘텐츠 진흥원에서 인터뷰 일정이 있었다. 공간의 음악이나 주변 소음이 없어야 한다는 사전 안내를 받지 못해서 업장 운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했다. 이미 생활관에서 음료를 드시고 계신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전에 얼마나 디테일한 정보를 주고받느냐도 일할 때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아쉽군.
저녁에는 정희진 선생님의 북토크가 있었다. 앞문으로 들어오실 때 혼잣말로 '아이쿠' 를 외치셨는데, 그게 너무 귀여우셨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캐릭터로 이미 자리 잡고 계셨다. 깊고, 깊은 통찰력이 있지만 말투가 귀엽고 웃음을 참지 않고 깔깔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가는 분. 귀엽고, 멋진 선생님은 경림 씨의 섭외로 생활관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관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10월 16일 월요일
오전 시간에는 밀렸던 중고 상품 진열을 하며 시간을 썼다. 오후가 되자 손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소소를 보러 오셨다면서- 반려견이 있으시냐 물었지만, 없어서 보러 오셨다고.
"저 여기 처음인데 어떤 음료가 제일 잘나가요?"
닥치고 추천하면 일이 편한데, 우리는 손님의 취향을 묻는 게 더 좋아서 다시 되묻는 과정을 거친다. 어떤 걸 좋아하시냐, 커피가 괜찮으시냐 등등. 긴 대화를 피하는 손님들은 종종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만 대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신다. 결론은 늘 커피지만;;;
손님의 손에는 세이노의 가르침이 들려 있었다. 나도 한때 성공에 목말라 정식 출간되기 전 문서로 읽었던 경험자라서 반가웠다. 손님 역시 나와 같은 버전의 책을 읽고 계시다고 했다. 목적이 무엇이든, 꼭 이루셨으면 좋겠다.
소윤 씨가 그의 연인과 함께 중고 물건을 위탁하러 오셨다. 옷을 보내는 아쉬운 표정이 옆으로 살짝 보였는데, 그런 표정이 좋다. 내 물건에 애착을 가졌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
10월 17일 화요일 (개인휴무)
10월 18일 수요일
역시, 손님이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월간 독서 멤버인 지은 씨가 독서모임을 위한 책을 사러 오셨다. 5권 정도 주문하면 괜찮다고 해서 입고했는데, 3권만 구매하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쪽 독서모임도 신청 인원이 많진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 주변에서 하는 독서모임이나 다른 커뮤니티 모임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서울에서 하는 모임에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알려고 하지 않고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 몰랐다는 하소연을 하신다. 물론 홍보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안산에는 그런 모임이 없을 거라는 확신에 찬 생각들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상황이 그런 것뿐. 그래서 아쉽고,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매번 한다.
이른 저녁에 준.소희 감독이 쇼핑백을 들고 생활관으로 오셨다. 골드 키위의 색을 띤 사과였는데, 너무 많이 받았다며 쇼핑백에 귀엽게 담아서 나눠먹자고 가져다주셨다. 그들은 곧 제주로 한 달 살이를 하러 떠난다고 했다. 워케이션 개념이긴 한데,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부럽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부럽다. 이럴 땐 내가 책임지고 있는 동물 가족들이 많은 게 아주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전혀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여행 대신 가족을 선택한 것뿐.
퇴근이나 하자!
10월 19일 목요일 (생활관 휴무)
10월 20일 금요일
오전에 요가원에 가서 탈탈 털리고 터벅터벅 걸어오느라 생활관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이 말은 뭐다? 청소를 못했다는 얘기. 이 말은 또 뭐다?? 손님이 청소하고 있을 때 들어올 확률 100%라는 얘기. 그렇다고 청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게으른 나 자신을 탓하며 눈치껏 청소를 마무리하면 된다. 다행히 손님과 보이지 않는 눈치게임은 하지 않았다. 다시, 이 말은 뭐다? 청소하는 동안 손님이 없었단 얘기.
요즘은 손님이 거의 없다. 날씨가 화창한 계절에는 사람들이 밖으로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우리 공간은 상대적으로 조용할 수밖에 없다. 익숙하다. 괜찮지 않지만 익숙하다. 시간이 많아진 나와 형진은 그동안 밀렸던 중고상품을 진열하고 정리를 했다.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일 거리를 찾아 하면 된다.
저녁시간에는 텃밭 클럽 멤버인 다솜 씨가 진행하는 깻잎 페스토 + 미나리 페스토를 쿠킹클래스가 있었다. 비건인 다솜 씨가 평소에 만들어 먹는 "집밥"은 초록 잎들로 만든 페스토를 섞은 파스타를 함께 만드는 시간이었다. 우당탕탕 절구로 깻잎을 빻고 탈탈탈탈 블렌더로 견과류와 초록 잎들을 갈았다.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사람들과 함께 먹으니 더 맛있었다. 평소에는 절대 먹지 않는 초록 잎들이 가득한 오일리한 페스토로 만든 파스타라니. 역시, 누구와 함께 먹느냐도 중요한 것이었어!
10월 21일 토요일
우리의 진짜 첫 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형진의 부모님에게 받은 폐차 직전의 황금색 차는 정말로 폐차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정신 없이 전화와 문자로 낯선 이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부지런한 현식 씨는 옥상 텃밭에서 애벌레를 잡고 뒷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셨다. 우리는 더 자연스럽게 현식 씨에게 자동차 키를 쥐여줬다. 자동차 무지랭이들 데리고 지식 전파하느라 힘드셨을 그를 위해 기꺼이 키를 내어드릴 수 있었다. 정아 씨와 성혁 씨도 브롬튼을 타고 멋지게 등장하셨다. 우리의 차에 이름을 붙였냐는 성혁 씨의 질문에 정말이지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의미를 두고 싶었고, 애정을 쏟고 싶었다. 이 차를 타고 소소와 함께 많은 곳들로 가 걷고 뛰고 싶어졌다. 함께 앉아서 쉬고 싶어졌다.
나와 형진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있으면 좋을 뿐. 하지만 우리가 차를 사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삶의 자극이 없이 그저 유유히 흐르며 흘러가듯 살고 있어서 전환점이 될 무언가가 필요했다. 차가 있다면, 그 차로 우리가 많은 것들을 눈에 함께 담고, 담은 것들로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기대라는 것이 언제나 늘 실망으로 돌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또 기대라는 걸 해봤다.
생활관 마감을 재빨리 하고 소소랑 한양대 에리카에 운전연습을 하러 가야겠다.
손님이 없으니 자꾸 혼자 생각하는 글이 쓰이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뭐 어쩌겠어. 이럴 때도 있는 거지. |